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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 오랜만에 업데이트입니다.
그러나 큐슈여행때 갔던 구마모토 성으로 외전격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범어사편 업데이트는............... 이번주 말에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여주세요) 잡설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구마모토성 이 성은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가 지은 성이다. 이성은 나의큐슈여행의 스케줄에 따라 가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성 입구에 도착 그리고 거기서 조금 걸어가니 성 입구를 볼 수 있었고 그 앞에는 해자가 있었다. ![]() 성 입구 앞의 해자 ![]() 그리고 성 입구 이 성은 현재 삼지환 부분은 없다 이지환 본환이 남아 있다. (이전에 메이지 시절의 전투로 본환과 이지환만 남았다.) (일본식 성 축조방식을 참조) ![]() 한국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가토가 만든 우물 이 성에서 눈길은 끄는것은 우물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 성을 만들때 100여개의 우물은 만들었다고 한다. 역사스폐셜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왜란말 울산왜성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에 포위당해 식량과 물 부족으로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를 교훈삼아 자신의 성안에 많은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곳은 10여곳 정도 밖에 안 된다니 조금 안타까웠다. ![]() 일본식 성 구조를 이해 할수 있는 한 부분 ![]() 본환 일본어로는 혼마루라고 한다. 우물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본환이 보였다. 본환은 박살나서 없어졌는데 복원 하였다고 한다. 본환 안에는 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형이 있었고 이 성의 영주였던 호소카와가 남긴 물건들 그리고 메이지시대 정부군에 항전한 자들의 유품을 볼 수 있었다. ![]() 성의 모형 성을 한 눈에 알아 볼수 있었다. ![]() 가토가 다음으로 이 성의 영주가 된 호소카와 가문의 갑옷 ![]() 메이지 시절 정부군의 항전한 자의 유품 이 곳 성의 방어 총 책임자였으며 계급은 대령이었다고 한다. ![]() 최 정상에서는 이렇게 멀리 있는 시가지도 볼 수 있었다. 그후 본환에서 내려온다음 본환 주변에서 쉬고 있었는데 두가지의 멋진 광경을 보았다. 하나는 관광가이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인 가족여행격 한 팀을 상대로 성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데. 워낙 장황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전국시대 이전 이야기부터 메이지시대까지의 이야기 엄청났다.) 그 외에는 닌자수련중이었던 사람이 있어서 좀 웃겼다 . 성위을 뛰어내렸다 올라갔다 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차림새는 뭔가 방어복 같은것을 입고 하는짓이 정말 웃겼다 --; 달밤의 체조 하는것도 아니고..;; ![]() 무더운 날에 체조하는 닌자 성 구경을 끝낸 나는 성을 뒤로하고 후쿠오카로 향했다. 일본식 성을 제대로 관람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 뭔가 전설이 있을것 같은 나무 일리가 없다(...)
그 동안 여러가지 일로 자성대를 갈 계획을 실행하고 있지 못 하였지만 결국 오늘에야 갈 수 있었다. 이미 일로 펑크난 강의를 넘기고 그냥 자성대로 가기로 했다. 134번 버스를 타고 집을 나서서 한 20분 지났나 자성대정류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한 5분쯤 겉고 나니 자성대의 동문인 달출문에 도착 하였다.
![]() 자성대의 동문인 달춘문의 사진 달출문은 원래 진동문(鎭東門)이었으나 1974년에 복원공사를 하면서 달춘문(達春文)이라고 성문의 이름이 바뀌었다. 참고사항: 자성대는 이전에는 아주 넓었으나 일제 침략기와 경제개발등에 의하여서 옛 모습을 거의 상실하였고 현재에 남아 있는 자성대는 1974년에 복원공사를 벌여 동문과 서문 동문주의의 성곽들을 새로 만든것이다. 그리고 임란때 일본이 부산진성을 점령후 일본식으로 축성한 왜성의 일부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일본식 성의 성벽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높고 길게 축조한 돌기단 육축위에 문루를 세운형태였다. 성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멋진 느낌 같은것을 받을수 없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그런것이 아닌 1974년에 복원하였다 보니 그런것 같았다. 그래도 성문이라는 느낌은 받을수 있었으니 만족은 한다. 이런 동문으로 들어가고 보니 표지판이 있었는데 표지판에는 서문으로 가는길과 최영장군의 사당으로 가는길이라고 표시 되어있었다. 우선 나는 최영장군의 사당으로 가기로 했다. 걷기를 한 4~5분 걸었나 최영장군의 사당에 도착 했다. 최영장군은 고려 말 왜구가 들끓을데 고려의 충신으로써 왜구를 소탕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사당 근처에있는 사당에 대한 설명을 해둔 판에 따르면 왜구를 소탕하는데 큰 활약을 세운 최영장군을 기리면서 이 사당을 세워 고기잡이라던가 여러가지 일들이 잘 되기를 빌었다고 하는것 같다. ![]() 최영장군의 사당 현재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것 같다 ;; 고려 말의 충신이며 끝까지 고려를 위해서 충성을 다한 최영장군의 사당을 뒤로 한 후 자성대의 정상인 진남대로 올라 갔다. 진남대를 올라가는 도중 성의 흔적인 성벽을 볼수 있었는데 성벽은 전형적인 일본식축성법인 삼지환 이지환 본환으로 성을 올려 쌓는 일본식 성의 형태를 볼수 있었다. 이 성은 일본식 성이 남아있다 보니 위에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둘러서 둘러서 올라가야 하는 곤란 함을 느낄수 있다 --; 이는 부산진성과 마찬가지다 --;; ![]() 일본식 축성법을 볼수 있던 성벽의 일부 참고자료: 이 성과 부산진성의 본성은 임란당시인 선조 26년(1593년) 왜장 모리 테루모토 (毛利輝元)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이 지성의 경우는 왜장 아사노 사치나가 (淺野長慶)가 선조 31년 (1598년) 축성과 함께 외곽 구축까지 끝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은 이 성을 소서성(小西城)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선조 30년(1597년) 왜장 고니시가 주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성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1598년 11월 22일 가토 기요마사의 명령으로 모두 불살라 버린뒤 퇴각 하였다. 왜군이 물러간 후 부산진 지성에는 명(明)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장수 만세덕(萬世德)휘하의 부대가 일시 주둔한 적이 있어 그의 공을 기려 만공단(萬公壇)이라 불리었다 만세덕이 귀국한 후 새로이 성을 쌓고 사대문의 축조 관위를 정비하여 부산진 첨사영을 오늘날의 좌천동 바닷가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따라서 부산진지성은 임지왜란후 부산진 첨사영이 된다. 부산을 배웁시다에서 발췌 (부산민학회) 일본이 쌓은 왜성의 을 보면서 얼마 좀 걸었나 자성대의 정상 진남대가 있는곳에 도착 하였다. 이 진남대는 1974년 자성대를 정비하면서 증층루대를 설치하고 진남대라고 명명하고 그 현판을 남쪽으로 향해 달았다. 진남(鎭南)은 자성(子城)에 가설되었던 남문의 이름이다. 진남대는 정자로써 볼만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1894년 7월에 각도의 수영이하 모든 군영이 해체되기 직전에 편찬된 영남진지(嶺南鎭誌)에 수록된 부산진지의 자성조(子城條)에는 자성위에 육우정(六隅亭)을 세우고 승가(勝嘉)라고 이름했는데 이 자성은 한 진(鎭)의 장대(將臺)가 되고 승가정은 자성의 장대가 된다고 하였고 그 규모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하고 정면 6개 기둥에는 여섯 개의 경치를 옮은 주련을 달았다고 한다. ![]() 진남대의 지붕 진남대 옆에는 충장공 천만리장군의 유적비가 있다. 천만리장군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병을 이끌고 왔다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천씨의 시조가 된다. 왜란이 끝나자 선조 33년 8월 만세덕과 이승훈은 귀국하였으나 그는 명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그의 공을 기려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상을 내렸으며 그의 아들 상도 한성윤으로 승진되었다.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유적비를 자성대에 세우고 매년 관민 합동으로 제사를 모셔왔으나 일제시대에 유적비를 철거하고 제사를 금하였다. 해방후 1947년에 뜻있는 유지들과 후손들이 유적비를 되찾고 새롭계 새겨서 비석을 세운다 매년 10월 9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 천만리장군 유적비 진남대와 천만리장군 유적비를 둘러 본호 나는 서문으로 내려왔다. 서문에는 우주석이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우주석의 입석의 연대는 사료에 나타난 것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부산진지성 양측 성곽에 끼여있으므로 임진왜란후 부산진성을 축성할 때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원래는 부산진지성의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는데 1975년 부산시에서 실시한 부산진지성 정화공사시 서문인 금루관(金壘關)을 복원하면서 이전하였다. 돌기둥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와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 새겨져있다. 남요인후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할만큼 요충지가 되는 남쪽 국경이다라는 뜻이고 서문쇄약은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 라는 뜻으로 임란 이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나타내는 유물이기도 하다. ![]() 서문의 모습 아쉽게도 비문이 있는 앞을 찍은 사진이 없다 --; 나는 이 서문을 나오면서 자성대 답사를 맞쳤다. 현재는 시민체육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격전지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자성대 . 선조들의 혼이 남은 성을 뒤로 하고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고자료 :부산을 배웁시다 부산 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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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출문이 아니라 건춘문..
by 김한근 at 01/18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by 출장마사지 at 05/13 홓ㄹㅇㅀㅀㅇㅀ by 문정근 at 04/15 ㅁㄴ어ㅏㅎㅅㄴㅇㅎㄹㅇㄴ by 문정근 at 04/15 웰컴 투 부산.... by GON★ at 08/09 아주 흥미로운 블로그 .. by 화양연화 at 05/21 |